
트로트 보컬과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며,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다.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이자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로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가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어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1,2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3,0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롯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가수다.

19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나 어린 시절에 데뷔한 것으로 인해 험한 연예계에서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1947년생이 아니라고 한다. 45년생인 남진도 조용필을 통해 나훈아의 나이를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 한 적이 있으며 자신보다 5~6살 어리다고 했다. 1960~1970년대 LP들에서 나이를 소개할 때 1950년, 1951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 나훈아가 대동중학교 시절 야구를 했는데 청소년 야구대표팀 감독과 포철공고, 서울고 야구팀 감독을 역임한 유태중(대동중 18회, 1967년 2월 졸업)과 동기였다고 하며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1951년생, 경남중 24회 1967년 졸업)이 'MBC FM4U 두시의 데이트, 박경림입니다'(2013.12.27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중학교 때 나훈아가 야구선수로 뛰었다. 나는 부산 경남중학교, 나훈아는 부산 대동중학교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면서 장기자랑을 할 때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 서라벌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호랑이 그림 화가로 유명한 서양화가 이목일 화백(1951년생, 서라벌고 13회 1970년 졸업)은 '그 시절부터 이미 노래 하나는 끝내줬던 인물'로 기억한다. “1학년 때 우이동 골짜기로 봄소풍을 갔었어요. 그때 홍기(나훈아의 본명)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불렀는데 함께 소풍 왔던 이웃 동덕여고생들까지 환호성을 질러 골짜기가 온통 함성으로 뒤덮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 이후 가수로 데뷔한 이 자랑스러운 홍기를 위해 친구들이 너도나도 엽서를 사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또한 80년대 중반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던 후배들은 선생님들이 과거 나훈아 학생에 관해 뒤쪽에 앉아 조용했고, 나중에 스타가 되어 학교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고 한다.
- 나훈아는 빠른 51년생으로 50년생들과 함께 1963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바로 중학교를 입학하지 않고, 1년 후 자신과 같은 51년생들과 함께 1964년에 중학교를 입학했다. 그래서 중학교 동창들부터는 전부 나훈아와 같은 51년생이다. 위에 굵은 글씨로 되어 있는것처럼 모든 정황 상, 나훈아는 51년생이 정설이라고 한다.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전매특허인 꺾기로 대표되는 나훈아 특유의 창법은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수많은 가짜 나훈아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달리 나훈아의 노래는 가수가 자기만의 색을 입혀서 노래하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되는 노래로 유명한데, 나훈아의 노래를 소화하다 보면 자칫하면 어설픈 모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나훈아의 창법은 엄청나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히트곡이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의해 작곡된 히트곡도 꽤 많다. 일례로 2005년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 같은 곡은 의외로 나훈아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았다. "행운", "남자라 울지 못했다" 등. 자작곡 중 다른 가수에게 준 곡도 있는데 이중에서 유명한 노래로는 <땡벌>(강진이 부름)이 있다. 사실 "땡벌"은 나훈아가 1987년에 이미 직접 불러서 발표했었다. (당시 땡벌을 부르는 나훈아 방송 영상). 또한 1991년에 원로가수 정원이 "인생은 본전"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잘 주는 편은 아니다. 땡벌 외에는 이자연이 부른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자작곡 전반을 보면 평생에 걸쳐 블루스와 민요를 트로트에 접목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가창력 만큼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장점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대 장악력과 무대 연출능력을 꼽을 수 있다.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자기가 작사 또는 작곡한 노래이고 작사와 작곡을 다 한 노래를 부를 때는 양 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한다.
라이벌 남진

마침 언론 및 대중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차이점들이 여럿 있었다.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투박했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노래의 성격 역시 남진은 도시의 세련된 이미지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한 반면, 나훈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나 시골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조차 대조적이어서 나훈아는 부산 출신의 서민 집안이지만, 남진은 전남 목포 출신의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다. 출신 지역도 각각 영남과 호남으로 나뉜 것은 덤.
그러나 나훈아 집안도 이미지만큼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어서 외국에서 사온 축음기도 가지고 있는 등 제법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이었으나,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던 남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 전 의원은 곡물 정미회사, 언론사 등을 경영한 기업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도 지냈던 인사였다. 남진의 회고에 따르면 한 때 전라남도 전체에 승용차가 두 대 있었는데 하나는 전라남도청에서 쓰는 전라남도지사용 관용차, 하나는 아버지 김문옥 의원의 것이었다고.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조성되어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치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 치워라'라고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남진이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부각되며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예술적인 곡을 많이 작곡•작사한 나훈아는 가수, 예술가로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
남진 콘서트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은 발매를 개시하자마자 10초도 안되어 동나기 때문에 콘서트 예매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방탄소년단, 이승환, 한국시리즈 7차전, 빅뱅, 명절 전 일반 열차, LCK 결승전 급으로 티켓을 예매하기 어려우며, 아들 딸 전부 동원해서 예매해도 성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것은 활동노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는 극도의 신비주의로 신곡을 발표하는 텀도 길게 두고,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방송 출연도 거의 하지 않는다.

반면 남진은 가요 프로그램이나 예능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등 트로트 가수치고는 다작하는 편이다. 남진의 팬 입장에서는 '반드시 콘서트에 가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가수로서의 각자의 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나훈아는 '저 하늘 위의 별'로서 본인을 포지셔닝한 반면 남진은 어디까지나 '대중의 친구'를 지향했다. 외모와 같은 외적 이미지조차도 이를 따라갔는데, 남진은 친근하고 편안한 아저씨의 이미지로 바뀐 반면 나훈아는 카리스마 있는 미중년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아이돌 가요계에 비유하면 코어팬덤형 아이돌과 대중형 아이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맞고 틀린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가진 가수로서의 가치관이 다른 것이다.
소문
-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195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부친이 외국에서 구매해 온 축음기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 덕에 형과 더불어 고향 부산에서 서울특별시의 서라벌예술고등학교로 유학도 올 수 있었다. 여기서 보듯 원래는 성악가를 목표로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곡가 심형섭이 오아시스 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에게 소개해줬고, 그가 LP판을 무료로 녹음시켜주겠다고 하면서[26]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우등생이었던 그가 꼭 의사나 판검사 같은 엘리트 직업을 갖기를 바랬던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인터뷰
- 1972년 6월 4일, 어느 스토커 같은 이에게 테러 당해서 한동안 입원한 적도 있다. 사이다병 파편으로 왼쪽 얼굴을 찔렸는데 무려 72바늘이나 꿰맸고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 있다. 1990년대 TV에 나와 과거를 회상할 당시 가수 위기를 겪었다고...
- 목격자인 이상벽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괴한이 처음 난입했을 때는 무대에서 싸우는 퍼포먼스인 줄 알았는데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사태 파악을 해서 괴한을 제압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남진이 사주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남진은 "재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으며, 또한 수사 결과 남진이 관련됐다는 증거도 하나도 안 나오면서 결과적으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남진의 증언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들을 스토킹하고 공격하던 사람이었고, 남진의 생가도 방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라이벌 남진도 테러당한 적이 있다. 남진 문서 참조.
- 영화배우 김지미가 나훈아의 재능을 크게 사서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 그 덕분에 현재도 나훈아는 서예에 능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인 사이를 유지하기도 했다.
-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 평했다. 김지미도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라고 평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질 당시 그녀에게 수천만원의 돈을 건넸는데, "여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당시는 이혼한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이긴 했지만, 나훈아의 군자다운 면모가 보이는 일화. 한편으로 김지미와 나훈아의 혼인이 화목했던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으며, 김지미는 주위에 간혹 나훈아와의 혼인이 조금 후회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말한 적도 있다. 원래 둘은 평범하게 식당을 경영하면서 살고 싶어 했지만 나훈아가 가수로 복귀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한다.
- 김지미와 이혼 후 가수 정수경과 동거를 하다 아들을 얻었고, 1983년 연말에 3번째 결혼을 한다. 1988년 딸이 태어났으며, 정수경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1993년 하와이로 거처를 옮기며 나훈아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아들의 결혼식에 나훈아가 불참한 이후로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 1984년에는 자신의 소속사 사장이던 박경춘 아시아레코드 사장에게 상무라고 칭한 서희덕 아시아레코드 기획이사를 때려 입건된 적도 있다.
- 한때 개그맨 황기순의 전처 불륜 상대가 나훈아였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는데, 이 역시 그냥 루머인 채 끝났다.
- 2012년 12월에는 인도와 티베트를 돌아다니며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고 한다. 지인이 말한 바로는 거의 도사의 모습이 됐다고...
- 2013년 4월, 세 번째 부인 정수경과의 이혼 소송에 들어갔다. 제1심에서 승소했으나 정수경 쪽에서 상고를 결정했다. 또한 지병이 있다는 게 알려지고 칩거했고, 양평에 있던 자택도 내놓았다고 한다.
- 나훈아의 아내 정수경이 2014년 10월 8일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나훈아 본인도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결국 조정 절차 거쳐 이혼에 합의하였고 재산분할로 12억을 지급했다.
- 2018년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때 북한에서 나훈아 참석을 요구했던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김정은이 도종환 장관에게 나훈아는 안 왔냐고 묻자 도종환 장관이 스케줄 때문에 못 왔다고 대답했는데, 이에 김정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고 한다. 나랏일하면서 가수 하나 못 불러내는 게 김정은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나훈아는 일부러 불참했다 밝혔다. 그는 80년대만 해도 남북 교류의 일환으로 평양으로 공연을 가기도 하고, 다른 가수 이상으로 북한 땅이 고향이지만 남한으로 피난을 온 실향민이나 북한 동포에 관심이 많아 대동강이나 평양 등을 주제로 하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주도한 장성택 처형 사건, 김정남 피살 사건에 심한 충격을 받고 이 사건의 장본인 앞에서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1년만의 공연에서 '통일 쾌지나'를 부르는 등 북녘의 주민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분단의 아픔에 공감했으나 김정은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모양이다.그는 자신의 공연이 대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 삼성 개인파티 공연도 유일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2008년에는 일본 야쿠자와 여배우 K를 놓고 시비가 붙어 음경을 절단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헛소문이 너무 돌자 나훈아는 이런저런 의혹에 답변하고자 1시간짜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훈아는 정말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기자 회견을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제가 지금부터 이 위에 올라가서,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고 단상 위로 올라갔고, 그 자리에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서는 "자, 지금 여러분들 중에서 대표로 얘기해 주십시오.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하며 원한다면 아예 바지를 벗어 증명하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것. 당연히 기자회견장은 그가 단상에 올라갈 때부터 술렁이고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 때 나훈아의 팬들이 나훈아를 굳게 믿는다고 외쳐서 진짜 바지를 내리지는 않고 일단락됐다.
이게 당시 시대상을 모르는 사람이 글로만 보면 우스운 해프닝처럼 보일 법 하지만, 실제로 그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초강수였다. TV에 많이 나와야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지도를 많이 쌓고 돈을 많이 버는 연예인들은 이때만 해도 진짜 누구 뒷배가 있지 않는 이상, 기자들 앞에선 그냥 일개 광대 취급을 받았다. 기자들이 기사 한 줄만 작심하고 써도 힘이 없는 연예인은 잘못하면 연예계에서 강제 은퇴당할 수도 있을 정도로 권력의 추가 언론으로 기울어진 그런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전 언론사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할 말 다 하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고 기자들에게 일갈한 나훈아의 이 퍼포먼스 덕에 여배우 K나 고자 스캔들은 한 방에 묻혀 버렸다. 반면에 기자들은 이전에 루머 유포에 앞장선 것도 있고, 이 때 나훈아가 저렇게까지 하는데도 사진이나 찍느라 바빴다는 것 등도 포함해 기레기 소리를 들으면서 욕만 실컷 먹었다. 나훈아는 추가로 인터뷰에서 "여러분(기자)들이 펜으로 사람(연예인들)을 죽이는 겁니다." 라고 다시 한 번 강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
대중문화 기자 백은하는 이 퍼포먼스를 "땅으로 내려왔던 셀러브리티가 그렇게 다시 하늘에서 빛나는 별로 올라갔다."라고 평했고,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이런 카리스마는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교주님이라 외칠 만하다." 라며극찬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 네티즌이나 기자들의 명예훼손, 허위사실유포, 모욕 등에 대해서 연예인들이 무대응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나훈아의 이 기자회견 이후로 서서히 법적 대응을 하는 기조로 바뀌었다.
이 퍼포먼스는 나중에 방송가에서 개그 프로그램을 비롯해서 여러 번 패러디되기도 했다. 2013년 1월, SNL 코리아 최민수 편에서 최민수가 패러디하기도 했다. 다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뭘 패러디 한 건지도 알 수 없게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아들어갔다.
콘서트 발언
- 2020년 추석 KBS에서 중계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 나오듯 코로나 대응에 대해 '역사에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적 없다. 모두 국민 덕',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라 발언했다.
- 2021년 7월 콘서트에서 이재명이 스캔들 관련해서 억울하다며 토론회 도중 '바지라도 내릴까요'라고 말한 것을 거론하며 '자기 바지보다 내 바지가 더 비쌀텐데'라고 했다.

- 2022년 6월, 나훈아는 콘서트 중에 문재인 정부 시절 북한 공연 초청을 언급하며 본인 노래는 다 서정적인데 고모부 처형하고 이복형을 암살하고 회의 때 존다고 사람 죽이는 뚱땡이 살인마 앞에서 사랑 노래가 어떻게 나오냐면서 김정은 옆에 있으면 노래가 아니라 귓방망이 날리는 것밖에 못한다고 밝혔다.
- 2025년 1월 10일 서울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열린 고별 공연 ‘2024 고마웠습니다-라스트 콘서트’ 첫날 무대에서 현 시국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왼팔을 가리키며 “니는 잘했나!”,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를 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 어머니는 형제가 어떤 이유가 있어도 싸우면 안 된다고 했다. 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국가를 위해서 하는 짓거리인지 묻고 싶다”며 “우리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 “TV에서 군인들이 전부 잡혀들어가고 있고, 어떤 군인은 찔찔 울고 앉았다. 여기에 우리 생명을 맡기다니 웃기지도 않냐”고도 했다. 다만 양당정치의 문제가 아닌 대통령 스스로 촉발한 초유의 사태를 너나 잘해라 식의 양비론적 시각으로 접근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해당 발언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의 김원이 의원이 무슨 오지랖이냐며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김영록 전라남도지사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 외에 이언주, 최민희도 비판에 가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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